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을진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변해가는 당신
당신은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나요?

가극(歌劇)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다룬
“아방가르드”한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딱히 관심이 생기진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때 난 초등학생이었으니까…
그렇게 잊히고 묻혀서 언제 꺼내볼지 생각도 안 들 무렵
인터넷 서핑을 하던 도중 어느 짤을 보게 되었다.
미소녀들끼리 멋진 옷 입고 싸우네?
봐야지 그럼……
이후로도 나무위키를 조금 찾아보니
애니 자체가 아방가르드한 느낌이라고 한다.
어릴 땐 몰랐지만 힙스터가 된 지금에야 좋아하지 이런 거
그렇게 초반 몇 화를 조금 봤는데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나쁘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좋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내용이었다
이런 애니 특성상 내용이 부실했다.
느긋하게 볼 수 있다면
어디까지나 세세한 감정의 묘사를 원한다.
무슨 느낌인지 알고 있지 않냐는 듯 넘어가도
이해에 지장은 없지만
박물관에서 점잖은 표정으로 걸어다니며
차례차례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의 현실미를 느끼기 위해
애니를 보는 것이 아닌가
그저 백합에 칼싸움 좀 넣었다고 끝이 아니라고!!!
(참고로 남자는 의문의 바이러스에 걸려 전부 죽었다.
만갤 일동은 개추를 눌러 애도를 표합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망의 8화 고독의 레뷰
그 시점부터 불안정했던 작화 퀄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와….

주인공의 과거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후 9화에선 주인공을 가로막는 경쟁 상대의 성장을 보여주며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스토리를 이끌어갔다
특히 그 경쟁 상대에 대해선
‘옛날 만화도 아니고 평범한 모브 캐릭처럼 디자인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점을 노렸던 걸까?
언제나 모두의 곁에서, 모두를 위한,
평범하고 다정한 자신을 내세웠던 그 아이는
교내 수석의 언급을 통해
언제든지 1등을 쟁취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한 소원을 빌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만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우리”들의 행복이겠지

‘과거가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점부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내일이 기대되는 마음 같은 건,
필자조차도 중학교를 졸업하며 두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조금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마디로 성장과 상실의 고통이란 것이다
성장을 동반한 상실의 고통
상실을 동반한 성장의 고통
순서 같은 건 뭐가 됐든 상관없다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며 한계를 배우고
상실을 깨닫기 시작할 무렵의 아이에겐
보다 정겹고
보다 가깝고
보다 아름다운 과거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런 과거가 불과 1년 전이다
그리고 1년 전의 1년 후인 지금
바뀌고 바뀌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 지금
불쑥 등장한 어느 수상한 사람의 한마디
너, 우리, 모두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그런 달콤한 말에
속이 깊고 항상 져주는 성격이었을
그 아이는 처음으로 경쟁에 의욕을 느꼈다
결과는 승리, 승리, 또 승리
하지만 여전한 미래.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며 같은 이야기를 재현하려 노력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도
만족을 알지 못해 다시금 되풀이되는 이야기
그렇게 끝없이 반복될 이야기였지만
주인공의 개입으로
결국 끝나버린 이야기
하지만
그때가 행복했지라고 자조하면서도
그 행복에서조차 더 나은 행복을 꿈꾸게 된다
그런 게 사람의 마음이다
아이는 같은 시간을 반복함에도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걸 보며
처음엔 좌절하고 두려워했으나
그와 동시에 바뀌어가는 나날들 사이에서,
모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행복해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절친에게 고백했을 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말과 표정으로
또, 지금껏 본 적 없던 모습으로
자신을 위로해 준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고집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이 순간
아이는 “이렇게 재밌는 너는 처음이야!”라고 말했다

이쯤 되니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이러다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한다
앞으로 단 3화만이 남아 있는데
이걸 어떻게 다 수습할 수 있지?
그런 번뇌에 휩싸인다
마침내 시작된 마지막 듀엣 레뷰(칼싸움)
수석과 차석 팀이라는 막강한 존재 앞에서
주인공은 승리한다
하지만 사회자 녀석, 뭔가 수상하게 생겼다 싶긴 했는데…
역시나 거짓말이었다.
“방금은 농담이고 혼또니 마지막 레뷰 하지마루요~~~”
라고 외치는 순간 자신과 팀이었던 친구가 기습해서
주인공은 그대로 무대 아래로 추락한다
그렇게 오디션은 끝나고
다음 날 그 친구는 자퇴했다는 벽보만 남긴 채 사라진다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고
계속되는 연락에도 답장조차 없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연습을 하면서 아무런 고양감도, 반짝임도 느껴지지 않고
자신이 왜 연극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구심이 들 무렵
주인공은 깨닫게 된다
친구가 왜 사라졌지?
왜 나한테 오디션을 보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진실
본래라면 히카리가 오디션을 우승한 대가로 가져가야 했을
모든 “반짝임”을 포기하고 전부 홀로 감당하고 있던 것이다.
왜?
나를 위해서.
우리들이 언제나 연극하고 있던 스타라이트라는 작품의 결말처럼
둘이서 행복해지는 미래 따윈 없는 거니까
그러니 모든 걸 짊어지는 역할은
자신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친구는 홀로 지하 무대에 남아
혼자만의 연극, 혼자만의 속죄,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시작되고, 끝나고, 다시 시작되고, 끝나고.
그 모든 연극의 내용을 혼자서, 몸소 재연하고 있었다.
또, 또 다시 나타난 주인공이 개입하기 전까진
대망의 마지막 화,
모든 건 지금을 위해서였다는 듯
극장판 수준의 작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주인공과 친구, 성죄의 레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자신은 남아야 한다.
그런 짓을 해버렸다간
너의 반짝임마저 빼앗아 갈 테니까.
그렇게 주인공을 베어 넘기고
우뚝 솟은 자신만의 무대에 홀로 선 채
반대편의 추락하는 무대와 함께 주인공을 보낸다
둘이서 행복한 무대 같은 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거라며
하지만 다시 솟아오르는 무대
대체 왜?
주인공에게 묻는다, 대체 왜?
이대로라면 소중하게 여기던 반짝임을
전부 잃게 될 텐데
대체, 대체 왜?
그때 주인공은 말한다
“내 전부를 빼앗아도 돼!”
“빼앗긴다 해도 끝이 아니야!”
“잃게 된대도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아!”
“무대 위에 설 때마다”
“몇 번이고 불타올라 다시 태어날 테니까!”

“나 재생산!!!”
본래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두 사람의 소원
하지만 바라고 마는 것이다
반드시 결별하는 비극이 있다면
그렇지 않았던 결말도 있었을 거라고
영원히 같은 연극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처음으로 둘은 같은 무대에서
수줍게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Position Zero

정말 좋은 애니였습니다….
사실 초반부를 실망한 것처럼 말하긴 했는데 그래도 재밌었어요
제가 애니를 끝까지 본 게 거의 4년 만이라는 걸 생각하면
진자 대단한 거임…. 노잼이었으면 절대 못 봤어
근데 후반부가 정말 상상 이상이라 후유증이 대단하네요
스타라이트라는 어떻게 보면 진부한?
그런 가상의 연극을 주제로
자칫 따분해질 수 있었던 걸 몇 번이고 반복하며
이렇게까지 잘 끌어낸 게 놀라울 정도로 신선하고
동시에 하….. 너무 좋네요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스포 때문에
(끝까지 읽은 사람 중에도 안 봤으면 혹시 볼 수도 있으니까…)
이만 줄이겠습니다….
읽느라 고생했어용